한 줄을 던지는 사람.

4편까지 우리는 키아누 리브스가 잃은 사람들의 이름을 함께 보았습니다.
친구 한 명, 딸 한 명, 약혼녀 한 명 — 10년 안에 일어난 일이었죠.

그러나 — 이게 그의 인생의 전부는 아닙니다.
그가 ‘슬픔에 갇혀버린 사람’이 아니라 ‘슬픔의 모양을 바꾸며 살아낸 사람‘이었다면, 그 답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 첫 번째 단서는 — 슬픔이 그를 덮친 시점보다 먼저, 한 슈퍼마켓 통로에서 시작됩니다.

1991년의 슈퍼마켓

1991년의 어느 날.
미국 로스앤젤레스. 한 평범한 슈퍼마켓의 어느 통로.

이때 키아누의 나이 27살.
이 해는, 그의 누이 Kim이 백혈병 진단을 받은 해이기도 합니다. Kim이 25살이었죠.
세상이 그에게 ‘너의 사람들이 한 명씩 떠나기 시작할 거야’라고 말을 시작하던, 정확히 그해입니다.

키아누가 그 슈퍼마켓 통로를 걸어가고 있었을 때 — 한 사람이 그의 시선에 들어왔습니다.

낯선 남자. 검은 머리.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사람.
그 사람의 옷에 — 한 장의 로고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디트로이트 레드윙스(Detroit Red Wings).

레드윙스는 미국 디트로이트의 NHL 아이스하키 팀입니다.
빨간 바탕에 날개 달린 바퀴 로고가 새겨진 유니폼.
키아누는 캐나다 토론토에서 자라며 아이스하키 골키퍼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별명은 ‘The Wall’. 한 점도 내주지 않는 골키퍼라는 뜻이었죠.
그는 한때 — 진지하게 NHL을 꿈꿨습니다.

키아누가 다가갔습니다.
그리고, 처음 만난 그 남자에게 한 줄로 물었습니다.

“Do you need a goalie?”
골키퍼, 필요하지 않아요?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 농담도 아니고, 진지한 제안도 아닌, 그 어딘가의 한 문장.
보통의 사람들은 이 문장을 슈퍼마켓에서 입 밖에 내지 못합니다.
키아누는 — 냈죠.

그 남자의 이름은 — Robert Mailhouse(로버트 메일하우스).
미국 드라마 《Days of Our Lives》에 출연하던 배우였고, 드러머였습니다.

두 사람이 그날 그 통로에서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는, 어디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 그날의 그 한 줄이, 두 사람의 30년 우정과, 한 밴드의 시작이 됐습니다.

Dogstar — 슬픔이 올 때마다 베이스

밴드의 이름은 — Dogstar.
‘개의 별’. 큰개자리에서 가장 밝은 별인 시리우스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키아누가 베이스를 잡았습니다.
그가 1987년에 산 첫 베이스는 — 영국 록밴드 Joy Division의 베이시스트 Peter Hook의 음을 따라 잡은 것이었죠.

Joy Division. 보컬 이안 커티스가 23살에 자살한, 1980년대 영국 ‘우울 록’의 시조.
그 밴드의 베이시스트를 흉내 내며 베이스를 시작한 청년이 — 후일 자기 친구를 23살에 잃게 되는,
그 우연이 시간 위에 새겨져 있습니다.

1995년. Dogstar는 호주·뉴질랜드 투어를 돕니다. 본조비의 오프닝.
그리고 LA 할리우드 팔라디움에서 — 데이비드 보위의 오프닝.

데이비드 보위가 자기 무대 앞에 세운 청년 중 한 명이 키아누였다는 사실은, 그 자체로 한 시대의 작은 기록입니다.

  • 1996년 EP Quattro Formaggi
  • 1996년 정규 1집 Our Little Visionary
  • 2000년 정규 2집 Happy Ending

이 음반들이 발매된 시점이 어떤 5년이었는가를 다시 보면 —

  • 1993년 핼러윈 새벽 — 리버 피닉스 사망
  • 1996년 EP — Dogstar 첫 음반
  • 1999년 12월 24일 — Ava의 사산
  • 2000년 — Dogstar 정규 2집
  • 2001년 4월 — 제니퍼의 죽음

시간선이 드러납니다.
키아누가 ‘친구를 잃은 직후’에 첫 음반을 내고, ‘딸을 잃은 직후’에 두 번째 음반을 냈다는 사실.
이게 우연일 가능성은 — 거의 없습니다.
그가 ‘슬픔이 올 때마다 베이스를 더 깊이 잡았다’고 말하는 것은, 추측이 아니라 — 시간선 위에 새겨진 사실이죠.

매트릭스의 7,500만 — 동료들에게 돌린 양도

키아누의 ‘슬픔을 다루는 두 번째 방식’은 — 동료들에게 한 줄을 건네는 일이었습니다.

그는 자기 출연료를 양도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닙니다.

  • 《The Devil’s Advocate》에서는 — 알 파치노(Al Pacino)를 캐스팅할 수 있게 자기 출연료를 깎았습니다.
  • 《The Replacements》에서는 — 진 핵맨을 캐스팅할 수 있게 자기 출연료를 90%까지 깎았죠.

그러나 — 가장 큰 양도는, 《매트릭스》 ‘속편’에서 일어났습니다.

2003년. 《매트릭스 Reloaded》와 《Revolutions》.
이때 그가 양도한 금액이 — 약 7,500만 달러.

한국 돈으로 약 1,000억 원.
한 사람이 한 영화 시리즈에서 받을 수 있는 ‘분배 수익’을, 그가 자발적으로 포기한 금액의 규모입니다.

이 7,500만 달러가 — 인터넷에서 ‘백혈병에 걸린 누이에게 준 70%’라는 신화로 변형된, 그 ‘원본’입니다.

그러나 진짜 자리는 다릅니다.

키아누가 그 돈을 양도한 자리는 — 매트릭스의 ‘특수효과 팀’과 ‘의상 팀’이었습니다.
그가 4개월 동안 목 보호대를 차고 함께 무술 훈련을 받았던, 그 옆자리에 함께 있던 사람들이었죠.

이 사실은, 후일 미국 《Wall Street Journal》이 그의 매트릭스 속편 계약서를 들여다보며 보도한 내용입니다.
그가 ‘분배 수익(profit points)’을 정식으로 그 두 팀에게 양도하는 조항을 — 직접 계약서에 명시했다는 것.

그는 그게 다가 아니었습니다.

할리 데이비슨
매트릭스 속편 호주 시드니 촬영장 — 키아누는 4개월을 함께 훈련한 스턴트 팀 12명에게 할리 데이비슨 한 대씩을 선물했습니다.
Photo by Harley-Davidson, Unsplash License

호주 시드니, 매트릭스 속편 촬영장.
키아누는 — 자기와 함께 4개월을 훈련한 ‘스턴트 팀 12명‘ 한 사람 한 사람에게 —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한 대씩 선물했습니다.

본인의 한 줄.

“We all worked on the film together. We trained together. I just wanted to give them a bigger thank-you.”
우리 모두 이 영화를 함께 만들었어요. 훈련도 같이 했어요. 더 큰 감사를 — 이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A bigger thank-you’. 이 한 영어 표현은 한국어로 옮기기 어렵습니다.
‘보다 큰 고맙다는 말’. 말로는 다 못 하니, 오토바이로 대신 전하는 ‘고마움’.
그게 정확히 그가 한 일입니다.

11년 뒤, John Wick

그리고 — 이 12명의 스턴트 동료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름은 — Chad Stahelski(채드 스타헬스키).
당시 그는 매트릭스에서 키아누의 ‘스턴트 더블’이었습니다.
키아누가 카메라 앞에서 발차기를 못 할 때, 그를 대신해서 카메라 안에서 발차기를 한 사람.

Chad Stahelski 2014
Chad Stahelski (John Wick 감독) Fantastic Fest 2014 — 매트릭스 시절 키아누의 스턴트 더블.
Photo by Anna Hanks, CC BY 2.0 — via Wikimedia Commons

11년이 흐른 2014년.

Chad Stahelski는 — 한 영화의 ‘감독’으로 데뷔합니다.
영화의 이름은 — 《John Wick》.
주연은, 옛 친구 키아누 리브스.

매트릭스 호주 촬영장에서 키아누에게 할리 데이비슨을 받았던 그 청년이,
11년 뒤에는 키아누의 슬픔을 영화로 빚어내는 감독이 되어
— 키아누 인생 후반부 가장 큰 작품을 만들게 됩니다.

이 인연의 시작이, 한 슈퍼마켓 통로에서 ‘골키퍼 필요하지 않아요?’라는 한 줄이었던 것이죠.
키아누는 — ‘그 한 줄이 30년 뒤에 그를 어떻게 받쳐줄지’를 그날 알지 못했습니다.
다만 — 그는 한 줄을 던졌습니다.


이게, 키아누가 ‘슬픔의 모양을 바꾸는’ 첫 번째 방식이었습니다.

사람을 만나면, 한 줄을 먼저 던진다.
같이 일한 사람에게는, 보다 큰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그게 평생 누적되어, 슬픔이 올 때 — 그를 받쳐주는 사람들로 돌아온다.

인터넷이 그를 ‘Saint Keanu — 성자 키아누’라고 부르는 이유의 진짜 자리는,
‘익명 기부’가 아니라 — 그가 30년에 걸쳐 ‘한 줄씩 던진 그 자리들’에 있습니다.
매트릭스의 70%를 누이에게 줬다는 인터넷 신화는 — 실제 진실보다 작죠.
진실은, 그가 7,500만 달러를 양도한 그 자리가 — 자기 누이가 아니라, ‘자기와 4개월을 함께 훈련한 12명의 동료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그 동료 중 한 명이 — 11년 뒤 그를 다시 ‘John Wick’으로 살려낸 감독이 됐다는 것.
신화는 ‘영웅의 일방적 헌신’을 그립니다.
진실은 — ‘서로가 서로를 받치는 30년’을 남깁니다.

그러나 — 그의 도구는, 이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두 번째 도구는 — 그의 가장 가까운 사람의 손 옆에 있었습니다.
10년의 백혈병을 함께 통과한, 한 사람의 ‘왕자’ 이야기.

6편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