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날개 아래의 바람을, 떠나보내다.

3편에서 우리는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 자그만 호흡도 들이마시지 못한 딸을 자기 손으로 묻은 키아누를 보았습니다.
그 분만 직후 키아누와 제니퍼는 헤어졌지만 — 두 사람은 친구로 남았습니다.

‘친구로 남는다’는 표현은 보통 헤어진 연인이 어색하게 인사하는 정도를 의미합니다.
이 두 사람의 ‘친구’는 그 결이 아니었죠.
같은 슬픔을 통과한 사람이 두 사람뿐일 때, 그들은 — 헤어졌어도 서로를 가장 잘 아는 사람으로 남게 됩니다.
그 시간에 그 분만실에 있었던 사람은, 지구 위에 그 두 사람뿐이었기 때문입니다.

2001년 봄. 두 사람은 다시 가까워지고 있었습니다.
후일 키아누가 경찰 조사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We were getting back together.”
우리는 — 다시 만나는 중이었어요.

Crepes on Cole — 그 봄의 마지막 브런치

2001년 4월 1일. 일요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작은 카페.
이름은 — Crepes on Cole. 콜 거리의 크레페 가게.

많은 매체가 이 카페의 이름을 정확하게 기록해두었습니다. 왜 그랬는지는, 글 끝에서 분명해집니다.

키아누와 제니퍼가 그 카페에서, 함께 브런치를 먹습니다.
크레페와 커피.
샌프란시스코의 봄 햇살.
다시 시작될 두 사람의 시간에 대한, 조용한 약속.

이날 두 사람이 어떤 이야기를 나눴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1년 3개월 전 큰 슬픔을 겪은 두 사람이, 다시 한 카페에 마주 앉아 어떤 마음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브런치 후, 두 사람은 헤어집니다.
키아누는 — 캐나다 토론토로 갑니다. 다음 영화의 일정 때문이었죠.
제니퍼는 — 로스앤젤레스 자기 집으로 돌아갑니다.

같은 날 저녁. 로스앤젤레스 할리우드 힐스.
마릴린 맨슨(Marilyn Manson)의 자택에서, 한 파티가 열리고 있었습니다.

마릴린 맨슨은 미국의 록 뮤지션입니다.
이름을 ‘마릴린 먼로’와 ‘찰스 맨슨’에서 합성한 것으로 유명한, 1990년대 가장 논란이 많았던 무대 인물 중 한 명이죠.
제니퍼는 데이비드 린치 감독의 《Lost Highway》 작업 중 그를 알게 됐고, 친분이 있었습니다.

제니퍼가 그 파티에 갔습니다.

파티의 분위기, 누가 거기에 있었는지, 그녀가 무엇을 했는지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 후일 그녀의 어머니가 마릴린 맨슨을 상대로 제기한 부당사망 소송의 소장 안에만 일부 남아 있습니다.

소장의 핵심은 한 가지였습니다.

맨슨이 제니퍼에게 ‘상당량의 불법 약물’을 제공했고, 그녀가 약에 취한 상태에서 운전하도록 했다.

맨슨은 모든 혐의를 부인했습니다. 소송은 법정에 가지 않고, 합의로 종결됐죠.
그러나 — 4월 1일 밤 그 집에서 그녀의 혈관 안으로 들어간 약물이,
다음 날 새벽까지도 그녀의 몸과 판단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는 것은,
부검 기록이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4월 2일 새벽 6시 20분 — 카후엥가 대로

4월 2일. 새벽이 가까워질 무렵.
제니퍼는 — 파티에서 나옵니다.
다른 손님이 그녀를 차에 태워 집까지 데려다줬습니다. 집에 도착한 시각, 새벽 5시쯤.

그러나 그녀는 — 집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잠시 머문 뒤, 자기 차의 시동을 다시 겁니다.

왜 다시 운전대를 잡았는지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가설 한 가지는, 그녀가 ‘파티로 다시 돌아가려 했다’는 것 — 이건 친구들의 추정이죠.
다른 가설은, 약에 취한 상태에서의 ‘비합리적인 결정’이었다는 것.
확실한 건, 그녀가 그 새벽에 운전대를 잡지 말았어야 했다는 것입니다.

차종은 — 1999년식 Jeep Grand Cherokee.
키아누가 그녀에게 사 준 그 집에서, 그녀가 매일 시동을 걸던 그 차.
그녀는 안전벨트를 매지 않았습니다.

새벽 로스앤젤레스 카후엥가 대로(Cahuenga Boulevard).

카후엥가 대로는 — 할리우드의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영화관, 음반사, 클럽이 늘어선 거리.
한국으로 치면 — 종로의 어느 한 구간 정도의 위치죠.
키아누가 30년을 일한 그 도시의, 가장 익숙한 거리 중 하나.

새벽 6시 20분.

제니퍼의 Jeep Grand Cherokee가 — 길가에 주차된 세 대의 차와 잇따라 충돌했습니다.
안전벨트를 매지 않은 그녀는, 차 밖으로 부분 사출되었습니다.

즉사. 28살.

차 안에서 발견된 것들 — 경찰 보고서가 박은 그대로 옮깁니다.

  • 처방약 두 병 — 근육 이완제, 항경련제
  • 둥글게 만 1달러짜리 지폐 두 장 — 안에는 흰 가루
  • 부검 결과 혈액에서 코카인 검출

그녀의 어머니 Maria St. John이 경찰에 진술한 한 줄도 함께 박혀 있습니다.

“My daughter was treating both back pain from a recent car accident and depression from losing her daughter 15 months ago — with medication.”
내 딸은, 며칠 전 다른 차 사고로 다친 허리 통증과 — 1년 3개월 전 잃은 딸로 인한 우울증을, 약으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허리 통증의 진통제. 우울증의 항우울제. 그리고 — 마릴린 맨슨의 집에서 들어간 코카인.
이 셋이 같은 혈관 안에서 그녀의 마지막으로 이끌고 맙니다.

“Jen Syme이 거기 있나요?”

소식이 키아누에게 전해진 시각.
제니퍼의 어머니 Maria가, 키아누에게 직접 전화를 걸었습니다.

키아누의 첫 번째 행동이 — 검시소 직원의 보고서에 그대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는, Los Angeles County Coroner’s Office —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검시소에 직접 전화를 걸어 묻습니다.

“Is Jen Syme there?”
Jen Syme이 — 거기 있나요?

‘Jen’. 그가 그녀를 부르던 애칭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매트릭스》의 주인공이, 검시소에 전화해서 — 자기 사람의 이름을 한 글자 줄여서 부르는 그 새벽의 통화가 — 어떤 음성이었을지를 우리는 짐작만 할 수 있습니다.

검시소 직원이 답합니다 — 예, 있습니다.
키아누가 다시 말합니다.

“I’m coming to identify her.”
제가 — 신원확인을 하러 가겠습니다.

검시소가 답합니다.

이미 신원확인이 완료됐습니다.

어머니 Maria가 먼저 도착해, 자기 딸을 — 자기 손으로 확인했던 것입니다.
키아누는 토론토에서 비행기로 LA에 도착해서 검시소에 전화했지만 이미 늦었던 것이죠.

굿셰퍼드 교회 — Wind Beneath My Wings

장례식은 — 며칠 뒤 베벌리 힐스의 굿 셰퍼드(Good Shepherd) 교회에서 열렸습니다.

데이비드 린치(David Lynch) 감독이, 제니퍼의 사진들을 모아 슬라이드쇼를 직접 만들었습니다.
교회 안에 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16살에 자기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던 모습까지가, 차례로 비춰졌죠.

데이비드 린치 (David Lynch) 2016
David Lynch, 2016 — 16살의 Jennifer Syme을 자기 사무실에 받아준 감독. 같은 해, 그는 《Mulholland Drive》를 Jennifer에게 헌정합니다.
Photo by Msubrizi, CC BY-SA 4.0 — via Wikimedia Commons

운구한 사람은 다섯 명이었습니다.

  • Keanu Reeves
  • David Lynch
  • Dave Navarro — 록밴드 Jane’s Addiction의 기타리스트
  • Scott Coffey — 영화감독, 제니퍼의 친구
  • Scott Ian — 메탈밴드 Anthrax의 기타리스트

장례식 음악으로 두 곡이 흘렀습니다.
첫 번째 — 바브라 스트라이샌드(Barbra Streisand)의 Higher Ground.
두 번째 — 베트 미들러(Bette Midler)의 Wind Beneath My Wings.

Wind Beneath My Wings. 우리말로 옮기면 — ‘내 날개 아래의 바람’.

이 곡의 후렴은 한 줄입니다.

“You were the wind beneath my wings.”
당신은 내 날개 아래의 바람이었어요.

그 노래가, 28살의 그녀가 묻히는 자리에서 — 흘렀습니다.
그리고 — 한 사람의 이름이 떠오릅니다.
‘Keanu’. 하와이어로 ‘산을 넘는 시원한 바람’.
이름이 약속한 그 ‘바람’은, 그 새벽에는 — 그녀의 날개 아래에 닿지 못했던 것입니다.

Westwood Village Memorial Park — 작은 청동 묘비
Westwood Village Memorial Park — Jennifer는 Ava 옆에 묻혔습니다. 두 사람의 작은 청동 묘비가 나란히 박혀 있습니다. (사진은 같은 공원 안의 다른 자리 — Truman Capote · Joanne Carson)
Photo by Alexis Doine, CC0 — via Wikimedia Commons

제니퍼가 묻힌 곳은 — 로스앤젤레스 웨스트우드 빌리지 추모공원.
1년 3개월 9일 전, 그녀의 딸 Ava가 묻힌 — 같은 공원입니다.
두 사람의 무덤은 — 나란히 위치해 있습니다.

  • Ava Archer Reeves. 1999–1999.
  • Jennifer Maria Syme. 1972–2001.

28살에 떠난 어머니 옆에 — 자그만 호흡 한 번도 못한 딸이 잠들어 있는 자리.

여기까지가 — 1991년 봄 토론토의 1,300마일에서 시작된 한 청년의, 첫 10년 이야기입니다.
10년 안에 그가 잃은 사람은 — 친구 한 명, 딸 한 명, 약혼녀 한 명.
세상은 그를, 매트릭스의 영웅 ‘네오’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는 1993년 친한 친구를 떠나 보내고
,
그가 1999년 크리스마스이브에 분만실에서 제니퍼 곁을 지키고,
2001년 4월 2일 검시소에 ‘Jen’의 이름을 묻고,
굿셰퍼드 교회에서 운구를 했을 때 — 그는 그저 한 명의 ‘서른여섯 살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영화 안에서 ‘총알을 비껴내는 사람’이었다면,
영화 밖에서는 — ‘총알이 비껴가지 않은 사람들의 이름을 외우며 사는 사람’이 됐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박혀 있습니다.

데이비드 린치 감독이 그해 만든 영화의 이름은 — 《멀홀랜드 드라이브(Mulholland Drive)》.
2001년 칸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받은 — 21세기 영화 비평가들이 자주 ‘최고작’ 자리에 올리는 작품이죠.

영화의 엔딩 크레딧 — 마지막 한 줄에, 데이비드 린치는 한 사람의 이름을 올립니다.

Dedicated to Jennifer Syme.
— 제니퍼 시미에게 바칩니다.

린치는 — 자기 사무실 문을 16살에 열고 들어왔던 한 당돌한 소녀에게,
자기 인생 최고작 중 한 편을 헌정한 것입니다.
영화 안에는, 한 여자가 ‘카후엥가 대로 비슷한 길’에서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 장면이 등장합니다.
이 장면은 제니퍼의 사망 ‘이전’에 이미 촬영이 끝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후일, 그 사고 장면을 다른 의미로 보게 됩니다.


여기까지가 — 키아누 리브스의 비극의 연쇄 10년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 키아누 리브스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 여기서부터 시작입니다.

그가 ‘슬픔에 갇혀버린 사람’인지, 아니면 ‘슬픔의 모양을 바꾸며 살아낸 사람’인지가 — 이제부터 24년에 걸쳐 펼쳐지기 때문이죠.

그 첫 번째 답은 — 그가 슬픔을 다루기 위해 한 가장 의외의 행동에서 시작됩니다.
1991년의 한 슈퍼마켓 통로에서, 한 낯선 남자에게 그가 건넨 한 마디.

“Do you need a goalie?”
골키퍼, 필요하지 않아요?

5편에서 이어집니다.